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1496년(연산군 2)에 무사 장정(張珽)·이원종(李元宗) 등과 함께 서정장수(西征將帥)에 임명된 뒤, 종성·회령의 부사, 의주목사 등을 지내고, 1516년(중종 11) 경상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왕비 윤씨(尹氏)의 책봉에 대한 주청사가 명나라에 파견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24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할 때에 삼둔(三屯)의 야인을 구축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오히려 대간과 의금부에서 탄핵되어 파직당하였다.
이듬해 병으로 돌아온 것이 밝혀지자 풀려나온 뒤 1531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山君日記 ≪참고문헌≫ 中宗實錄
이감 [李敢]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언신(彦信). 아버지는 참판 광식(光軾)이며, 어머니는 이세응(李世應)의 딸이다. 1543년(중종 38)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그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예문관봉교로 있으면서 중국에 보내는 자문(咨文)의 글씨를 잘 써서 칭찬을 들었으며, 이어 정언이 되어 윤원형(尹元衡)·윤춘년(尹春年)과 결탁, 사류를 공격하는 데 가담하였다.
이어 사헌부·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특히 무재를 인정받아 1552년 함경도순변사 이준경(李浚慶)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기도 하였고, 종성부사로 변경수비를 맡기도 하였다. 1558년에는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승지·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량(李樑)이 중용되어 국정을 전단하자 시세에 좇아 그의 심복이 되었다. 이량의 후원하에 병조참판·도승지·형조참판 등 요직을 두루 거쳐 1563년 대사헌에 기용되었다.
이때 이량의 사주로 이문형(李文馨)·허엽(許曄)·기대승(奇大升)·윤근수(尹根秀) 등 당시 명망 있던 사림을 탄핵하여 밖으로 내쫓으면서 다시 한번 사림에게 대대적인 타격을 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막으려는 심의겸(沈義謙)의 노력으로 도리어 홍문관부제학 기대항(奇大恒)에 의하여 탄핵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명종 말엽 윤원형세력이 몰락하고 사림들이 득세하자 양사 및 홍문관에서 여러 차례 죄를 주자고 주장하였으나 왕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그뒤 1581년(선조 14) 천재가 심하여 대사면이 단행되자 방면되었다.
1601(선조 34)∼1643(인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사상(士常)·중구(仲久). 대사헌 감(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주서(注書) 성헌(成憲)이고, 아버지는 선무랑 길남(吉男)이며, 어머니는 도사 정욱(鄭彧)의 딸이다. 임숙영(任叔英)의 문인이다. 1627년(인조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성균관학유로 등용되었으며, 그 뒤 전적·감찰·형조좌랑·공조좌랑·공조정랑·종묘서령 등의 내직을 지내다가 외직인 신계현령·예안현감·결성현감, 경상도·함경도의 도사 등을 지냈다.
그는 글을 좋아하여 항상 손에서 서책을 놓지 않았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참고문헌≫ 國朝榜目 ≪참고문헌≫ 記言別集(許穆)
이광식 [李光軾] 블로그담기 | 인쇄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우계(羽溪). 아버지는 지방(之芳)이다. 대사헌 감(戡)의 아버지이다. 무반승지로 불리는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523년(중종 18) 세자익위사사어(世子翊衛司司禦)에 진출하였다.
1528년(중종 23)에는 첨정(僉正)에서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에 제수되었으나 경력이 얕은 자가 갑자기 승진되었다는 대간의 논박으로 체직(遞職 : 관직이 교체됨.)되어 김해부사로 내려갔다.
그러나 나이가 젊고 무재(武才)가 있는 자이기에 오히려 양계(兩界 : 변방지역으로 국방을 위한 특수행정구역)에 적합하다는 대간의 지적에 따라 갑산부사에 제수되었다.
이후 종성부사를 거쳐 1533년(중종 28)에 가선대부로 승진하였고, 이어 여주목사·성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중종 39) 평안도절제사로 재직시 국경지역의 야인 진무에 공을 세웠고, 명종이 즉위한 뒤에도 임기가 차 체직되어야 하나 서쪽 변방의 일을 계속 맡아 보았다.
청렴하고 근실한 노장(老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아들 감(戡)이 훈구외척 이량(李樑)과 결탁하는 것을 항상 책망하였으나 결국 화가 미쳤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참고문헌≫ 明宗實錄 ≪참고문헌≫ 燃黎室記述
이복남 [李福男]
?∼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우계(羽溪).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선조 25) 나주판관이 되고, 이듬해 전라방어사·충청조방장(忠淸助防將), 1594년 남원부사·전라도병마절도사, 1595년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에서 왜군과 싸우던 중,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산성별장(山城別將) 신호(申浩)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1612년(광해군 4) 남원 충렬사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참고문헌≫ 燃藜室記述 ≪참고문헌≫ 壬辰筆錄
이서우 [李瑞雨]
1633(인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윤보(潤甫), 호는 송곡 (松谷). 성헌(成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길남(吉男)이고, 아버지는 경항(慶恒)이며, 어머니는 이경유(李慶裕)의 딸이다. 당색으로는 대북계열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 생원시를 거쳐 1660년(현종 1) 성균관유생으로 과제(課製)에 1등하여 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으며, 그해의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75년(숙종 1) 문장에 재주가 있다 하여 허목(許穆)의 추천을 받았다. 같은해 정언이 되어 인조반정 이후 대북가문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청직(淸職)에 올랐다.
서인 송시열(宋時烈)의 예론과 그것을 따르는 김수항(金壽恒)을 공격하였으며, 7월에는 대신을 공격하는 이수경(李壽慶)을 두호하다 파직당하였다. 1676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남인으로 생활하다 1680년 경신환국 때 서인의 공격을 받아 유배당하였으나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병조참의로 등용되었다.
그 뒤 김수항 등 서인을 공격하였으며, 인현왕후(仁顯王后) 축출 때 승지로 있으면서 숙종의 뜻을 받들었다. 1691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인삼에 대한 행정처리 잘못으로 삭직당하였다. 이듬해 목내선(睦來善)에 의하여 문장으로 천거받아 예문관제학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갔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삭출당하였다가 1697년에 풀려났다. 그 해 남인을 등용하는 정책을 펴던 최석정(崔錫鼎)에 의하여 청백함을 인정받아 서용하라는 명령이 임금으로부터 내려졌으나 현직에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참고문헌≫ 肅宗實錄 ≪참고문헌≫ 燃藜室記述 ≪참고문헌≫ 國朝榜目
이심
1581(선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여첨(汝瞻). 아버지는 효린(孝麟)이며, 어머니는 이여량(李汝樑)의 딸이다. 영천(榮川) 출신.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4년(광해군 6) 홍문록(弘文錄 : 홍문과 교리·제학 등을 선발하기 위한 홍문관의 제1차 인사기록)에 오르고 이듬해 정언이 되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幽閉) 논의에 이원익(李元翼)의 언사가 왕에 대해 무례함을 비판하였다.
1616년 부수찬을 거쳐, 부교리로 춘추관기주관을 겸하여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교리가 되어 인목대비의 유폐 논의에 “쟁리(爭利)와 예의를 절충하면 은(恩)과 의(義)의 경중을 따라 스스로 대처할 바가 있다.”고 하여 빨리 결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1618년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파병할 때 강홍립(姜弘立)을 수행하였으며, 돌아와 예조정랑이 되었다. 1623년(인조 1) 풍기군수로 재임 중 흉도들과 결탁하여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일찍이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과 친하여 그의 정치적 행위에 언관으로서 비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참고문헌≫ 仁祖實錄 ≪참고문헌≫ 國朝榜目 ≪참고문헌≫ 燃藜室記述
이여빈
1556(명종 11)∼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덕훈(德薰), 호는 취사(炊沙) 또는 감곡(鑑谷). 아버지는 참봉 효신(孝信)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4대손인 귀윤(貴胤)의 딸이다. 한우(韓佑)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 24) 사마시에 합격, 16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벽사도찰방(碧沙道察訪)으로 나갔으나 1년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10년(광해군 2) 성균관전적으로 등용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이 국정을 문란하게 하므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 정인홍 등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감곡(鑑谷)에 은거하여 후진 교육에 힘을 쏟았다.
1614년 옥사가 일어나 이이첨과 정인홍이 폐비를 주장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옳지 못함을 상소하고 7일 동안 합문(閤門) 앞에 엎드려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15년(숙종 41)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취사문집≫ 6권이 전한다.